제44화
웬 여자가?
무달의 막사.
무달과 고사부.
"대장군께서 오신다는 말에 주민들은 환영일색입니다."
"거짓말."
"사실이옵니다."
"내 무자비함이 겁나겠지."
"마을 마을마다 우리 쪽 주민들이 벌써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쁜 일은 아니야. 하지만 접경민들은 믿을 수 없지. 절대로 믿을 수 없어. 그들은 언제든 신라나 백제 쪽으로 기울 수 있는 사람들이야. 지금의 형세야 우리가 월등 유리하니까...어쨌든 서둘 필요는 없어. 바람만 잡는 거야. 나도 백제 제신과는 맞붙고 싶지 않아 거염이 있는데 내가 왜 힘을 써야 하나?"
무달과 고사부.
마주보며 웃는다.
그러나 의미가 다르다.
신라 거염의 비밀 막사.
초조하게 서성이는 거염.
이윽고 말에서 내리는 흠운과 길상.
"대장군, 흠운 대장군님을 모셨사옵니다."
"오오!"
거염, 뛰어나간다.
읍을 한다.
"어서 모시게."
"오랜만일세."
흠운과 길상, 거염에게 읍을 했다.
거염, 그리고 군사들, 모두
흠운에게 부복.
"대장군님, 이제야 뵙습니다."
거염을 일으켜 세우며.
"대장군, 일어나시게."
"먼 길 불편하셨지요?"
"아닐세. 길상 장군의 말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왔네."
모두 자리에 앉았다.
"꼭 꿈만 같사옵니다."
"하하하. 세상사는 별 일이 다 있습니다. 저도 꿈만 같소."
"대장군님!"
"길상 장군에게 들었소. 내가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고?"
"차마 말씀드리기가......"
"하하하. 이제는 이 나라에서 내가 영영 쓸모없는 줄 알았더니 늙은 내가 쓸모가 있어요오?"
거염, 또 다시 일어나 흠운에게 부복했다.
흠운이 거염의 손을 잡았다.
"대장군님!"
"내가 갈 것이오. 내가 무달과 제신을 만날 것이오."
거염, 눈물을 흘린다.
흠운, 거염을 일으켜 세웠다.
"대장군님! 이번 가시는 길은 십중팔구 죽음의 길이옵니다."
"흐흐흐, 그게 내가 바라던 바가 아니오. 모름지기 장수는 전장에서 죽어야 하는 법. 대장군 정말 고맙소. 이 나이에 나라를 위해서 죽는다면 그보다 더한 광영이 어디 있겠소?"
거염과 길상, 한꺼번에 부복하며.
"오늘 저녁 저하고 술이라도 한 잔?"
"놓아두시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만약 내가 죽는다면 이 술 대신 훗날 내 무덤 위에 거염 대장군의 눈물을 뿌려주시오."
"대장군님!"
아리수 강변 길.
말을 달리는 흠운.
고구려군 무달 막사 안.
무달과 고사부.
"백제의 수군은 우리보다 강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지금 제신은 우리 고구려의 동태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거염을 치기 위해서 거의 전 군사를 침을 쪽으로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고량진엔?"
"삼천 정도의 군사가 있긴 하나 그마저도 침을 쪽으로 옮길 모양입니다."
"믿을 수가 있나?"
"제신은 용맹하기는 하나 늘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인물입니다."
"아직 젊으니까. 그래도 백제에선 가장 병법에 뛰어난 장수야. 삼국 최강인 백제 수군의 대도독이다."
"바로 그걸 노린 겁니다. 그는 뜬 소문을 절대로 믿지 않는 위인입니다."
"자넨 활솜씨만 좋은 줄 알았더니, 세 치 혀도?"
"송구하옵니다."
"그런데 신라에서 사자를 보냈다고 하던데....?"
"예?"
그 때, 그 막사 앞에 고구려 군사들의 안내를 받아
은밀히 말에서 내리는 흠운.
무달과 고사부 앉아 있으면 병사와 함께 들어오는 흠운.
흠운, 무달에게 읍을 했다.
무달도 일어나 읍을 했다.
"신라의 늙은 장군 흠운, 고구려 무달 대장군께 인사 올립니다."
"멀리서 뵈었지만 이렇게 뵙기는?"
"나도 그렇소. 먼발치서 무달 장군의 용맹은 보았소만!"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나 또한 무달 장군을 뵙고 싶었소."
두 사람, 손을 맞잡는다.
"무달 대장군께서는 여전하외다."
"10년 전인가 전장에서 뵙고 정말 오랜만이외다. 신라 장수 중에 대장군같은 분이 있다는 것은 신라의 홍복이오. 일단 앉으시지요?"
흠운, 무달에게 서찰을 건네고 앉는다.
무달, 서찰을 펼쳐 읽는다.
인상을 찡그린다.
"사실이오?"
"우리 거염 대장군은 비록 전장에 나와 있지만 의를 아는 선비 중의 선비외다."
"그가 무장이 아니라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소. 그런데도 백제의 제신이 번번히 농락을 당했으니."
"거염 대장군은 병법에 뛰어난 장수지요."
"이번에도 그 병법의 일환으로 나를 찾아온 게 아닙니까?"
"물론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신라는 고구려와는 아무 원한이 없는 관계로...사실 신라와 고구려는 형제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여러 제도와 풍습으로 봐도......"
"그거야 신라와 백제가 더 가깝지 않겠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신라야 어디 고구려와 대적할 군사력이 되겠습니까?"
"하하하. 그건 사실이지요. 그렇지만 내가 대장군을 그냥 보내겠소?"
"이미 죽은 몸. 대장군께서 저를 놓아준다면 이 길로 제신에게 달려갈 것입니다."
"뭐요?"
"심중팔구는 죽겠지요. 그가 나를 살려두겠습니까? 거염 대장군과 내가 그의 부모형제들을 몽땅 죽였는데....."
"흠운 대장군, 이 전쟁에 삼국의 운명이 걸렸는데...과연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하하하, 고구려의 무달, 백제의 제신, 신라의 거염. 가히 삼국 최고의 명장들이 붙었습니다."
"저야 어디?"
"아니지요. 각기 다 특색이 있는 장군들이지요. 이 세 장군이 한 나라에 있었다면, 저 중국의 넓은 땅이 우리 땅이 되었겠지요."
흠운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무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 사실 나도 이 전쟁에서 누가 이길 지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지금 상태로 가장 강한 수군은 역시 백제지요. 더구나 제신 장군은 무달 대장군이나 거명 장군과 달리 수군에서만 잔뼈가 굵은 장군이오. 비록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그 병법은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신과 소장이 싸우기를 부추기는 겁니까?"
"하하, 내 비록 신라의 장군이기는 하지만 삼국의 세 장수 모두를 아끼고 있습니다. 내가 삼국의 통일을 원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요. 세 장군이 나란히 한 깃발 아래 출정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그리 나쁜 일인가요?"
"하하하, 역시 대장군님은 다르십니다."
"난 대장군의 성품을 알고 있소. 아마도 대장군은 날 살려둘 것이오."
"그런가요?"
"그런데 백제의 제신 장군은 날 살려두지 않을 것이오."
"예?"
"그 또한 나라를 떠나 참으로 뛰어난 명장이오. 그래서 두고 두고 후환이 될 나를 결코 살려두지 않을 거요."
"그래도 가시렵니까?"
"혹 내가 잘못되면 언제 네 무덤에 술 한잔 부어 주시오."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대장군과의 만남은 내 일생일대의 즐거움이었소."
"저 또한 그러했습니다."
"난 전쟁의 승패에 관계없이 대장군을 믿소."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
일어나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무달이 고사부에게 짧게 말했다.
"흠운 대장군님을 배웅해드려라!"
"대장군!?"
흠운이 떠나고 나면
안색이 굳는 고사부.
"거염을 어떻게 믿고 곧바로 약속을 하셨습니까?"
"약속이라니?"
"예?"
"난 그들을 믿지 않아. 신라의 거염? 약속을 밥 먹듯 깨는 위인이야. 내가 제신과 다른 점이 바로 그거야. 난 전장에서의 약속을 절대로 믿지 않아. 거염이 왜 흠운을 보냈겠나?"
"그럼?"
"일단 약속을 해놓고 그들의 동태를 살피는 게지."
"흐흐. 그럼, 그렇지요."
"백제의 수군은 우리보다 강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지금 제신은 우리 고구려의 동태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거염을 치기 위해서 거의 전 군사를 침을쪽으로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고량진엔?"
"삼천 정도의 군사가 있긴 하나 그마저도 침을쪽으로 옮길 모양입니다."
"믿을 수가 있나?"
"제신은 용맹하기는 하나 늘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인물입니다."
"아직 젊으니까. 그래도 백제에선 가장 병법에 뛰어난 장수야. 삼국 최강인 백제 수군의 대도독이다."
"바로 그걸 노린 겁니다. 그는 뜬 소문을 절대로 믿지 않는 위인입니다."
"자넨 활솜씨만 좋은 줄 알았더니, 세 치 혀도?"
"송구하옵니다."
깜빡깜빡.
반짝반짝.
가막골엔 오랜만에 밤새 불이 꺼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사람 냄새가 났다.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아세요?"
분홍이 잡든 틈을 타서 달래가 비거에게 물었다.
비거는 빙긋.
생각에 잠겼다.
간현.
비거는 달래와 분홍보다 간현을 더 잘 알았다.
서로 강 맞은 편에서 고기잡이로 산 평생.
이 세상 그 누구도 모르는
믿지 못할 일을 비거는 알고 있었다.
간현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와 외롭게 사는
젊은 어부 간현이 그물을 메고 나루터로 가고 있었다.
철썩, 철썩.
밀려온 강물은 모래밭에 닿으면 잔잔하게 부숴져
한알 한알 모래알 모두를 어루만져 주었다.
끼이룩, 끼이룩.
물새가 한 마리씩 날아들며 울다 가면
아리수는 더욱 명경처럼 조용히 가라앉았다.
간현의 마음은 항시 무거웠다. 어머니 때문이었다.
병든 어머니는 갈수록 투정이 심해졌던 것이다.
잠시라도 옆에 붙어있기를 싫어했다.
항시 아리수에 나가라고 채근이었다.
알 까닭이 없었다.
세상에 뜻이 없는 간현으로서는
어머니의 채근이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어머니를 놔두고
아리수 근처에 있다는 아리도원을 찾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간현의 마음은 언제나 아리도원에 있었다.
그곳으로 가면 성가신 어머니의 잔소리도 들을 필요가 없고,
자잘한 집안일에서도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언제나 꽃은 만발해 있고, 어여쁜 아낙들이 지천으로 있는 곳.
그는 그 아리도원을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몸져 누운 어머니의 역정을 모두 받아들여야 했다.
간현은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집안을 탈출할 수 있는가에 쏠려 있었다.
몸이 실하기로 마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억센 간현이었지만
요즈음에는 두손 두발 다 들 지경이었다.
도대체 무슨 병인데 저리 어물만을 찾을까?
그리고 그 많은 어물을 다 어떻게 하셨을까?
그러나 그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 즉시로 돌아누워 전보다 심하게 앓았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잉어가 잡숩고 싶다고 하셨는데……젠장 당장 관가에서 영장이라도 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꼬……신나는 싸움을 해볼 텐데……"
.
그날부터 어머니는 앓아눕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간현이 아리수로 나가지 않으면
어머니는 간현을 채근했다.
관청 높은 분들이 요구하는
고기량이 점점 늘어났다.
오늘은 자라가 먹고 싶다.
오늘은 잉어가 먹고 싶다.
이렇게 날씨가 너무 좋은 날은 고기가 잡히지 않는데…….
그러나 간현은 고기잡는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그는 고기가 어디에 많은지,
어떻게 그물을 던지면 고기들이 딸려오는지를 샅샅이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모두 전쟁터에 나가 죽었는지도 살았는지도 모르는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리수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반 강제로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간현도 아리수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같이 날씨가 쾌청한 날은 강심이 아니고
나루와 가까운 강기슭에 배를 댈 참이었다.
그 때 혜선사 말대로 서라벌의 궁성을 빠져나온 공주 선례는
누가 오는 줄도 모르고 평화롭게 잠을 자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다.
"아니 웬 여자가!"